

한 사람과의 유대를 위해서라면 인류조차도.
앤디 위어의 이 SF 소설은 작년에 읽은 소설 중에 손에 꼽힐 수작이었습니다. 소설도 영화도 과학적 사실과 지적 재미가 이 스토리를 구성하는 주요한 동력이자 지반임은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는 일반적인 SF의 사유나 메시지보다도 캐릭터 자체에 코어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구를 떠나오기 전의 그레이스 박사와 우주에서의 그레이스 박사의 이야기가 챕터가 교차 거듭되면서 감정의 파고를 짜임새 있게 흔들어 놓습니다.
하여, 영화의 티저가 작년부터 나돌 때도 애써 눈을 피해 왔습니다. 영화를 보기 전까지 로키는 물론 우주선의 표현 같은 비주얼로 인해 조금이라도 상상력이 침해당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영화에서 싱크로율이 가장 높았던 역은 에바 스트라트 역의 산드라 휠러입니다. <추락의 해부>나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본 사람이라면 산드라 휠러가 깊게 각인 되었으리라 예상합니다. 에바 역에 그녀보다 어울리는 여배우가 있을까요? 소설을 읽을 땐 케이트 블란챗을 상상해 보기도 했습니다만 호주 출신의 케이트 블란챗보다는 독일 출신의 산드라 휠러가 더 적합한 사람임을 첫 출연 씬에서 이미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영화 <토니 에드만>에서 산드라 휠러가 부른 'Greatest love of all'은 정말 인상 깊었죠. <프로젝트 헤일메리>에서도 산드라 휠러는 해리 스타일스의 'Sign of the times'를 다음 날 밤에도 생각날 만큼 절묘하게 부릅니다. 에바의 담담함과 단호함 속에 드러난 부드러운 내피 같은 감성을 표현하는 그녀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에 비하면 라이언 고슬링은 소설 속 그레이스 박사에 비해 좀 더 위트 있고 그래서 더 강인해 보입니다. 소설 속 그레이스 박사는 그에 비하면 좀 더 유약하달까요? 이름을 기억해 내는데 소설의 초반이 꽤나 할애되면서 전달하는 캐릭터성도 영화에서는 생략되면서 상쇄되어 버렸고, 휠씬 더 (오랫동안) 찌질하게 구는 표현이 영화 구성 상 많이 빠진 부분도 한몫합니다.
그렇게 집착하던 삶의 존속을 포기하고도 선택하게 되는 로키와의 일들이 영화에서는 유대감을 빌드업할 시간이 부족했기에 아무래도 개연성이 부족해 보였습니다. 그 연대의 클라이막스에서 간만에 소설을 읽으며 눈물을 흘렸던 저로서는 그 부분이 너무 아쉬웠답니다. 러닝 타임을 3시간으로 늘리고라도 로키와의 감정 빌드업을 더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합니다.
로키는 에바나 그레이스 박사와는 달리 (그가 외계인임에도!) 외형이 그의 캐릭터를 만들지는 않습니다. 로키의 캐릭터를 만드는 것은 바로 언어지요. 소설에서 한국어로 번역된 로키의 말은 이 소설의 백미 중 하나입니다. 그레이스 박사와 로키의 유대가 둘의 서툰 언어 소통 사이에서 더 밀도를 높이는 장치이기 때문입니다. 외계 언어를 영어로 그레이스 박사에게 번역되기까지는 당연히 상당한 시간이 걸립니다. 영화에서는 그것을 다 표현하기 어려웠고 그래서 관객이 체감하기도 부족해 보였습니다.
그것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이 프로젝트에서 독자 또는 관객이 몰입하고 집중을 잃지 않는 이유였겠지요. 머나먼 우주를 몇 십년이나 홀로 지내야 하는 그레이스 박사의 외로움, 그보다 더 많은 시간과 상실을 안고 있는 로키의 외로움. 그 둘의 외로움이 만나 관계라는 이유를 완벽하게 구현해 줍니다. 소설을 읽을 때 가장 감정적으로 흔들렸던 부분이 바로 이 외로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단 한 사람과의 유대를 위해서라면 인류고 세계고 버릴 수 있는 마음. 그런 큰 구멍이 제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경험이었다고 할까요.
영화로 먼저 봐도, 영화만 봐도 충분히 재미있는 영화임은 분명합니다. 다만 오랜만에 소설 책을 한 권 재미있게 읽어 보는 경험을 해 보고 싶으시다면 추천합니다. 재미로 시작할지라도 마지막에는 분명 더 깊은 거울을 보게 될 테니까요.
앤드류와이어스
김해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