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지만 당신은 취향이 없을지도 몰라요.
여러분들은 음원 서비스 중 어떤 걸 이용하시나요? 저는 십 년 가량 스포티파이를 메인으로 사용하고 있고, 유튜브뮤직, 그리고 애플뮤직을 사용합니다. 음악을 좋아하기도 할뿐더러 각 서비스마다의 특장점이 달라 상황에 따라 다른 서비스를 사용합니다. 예컨대, 스포티파이가 더 다양한 전 세계의 인디 음악들을 스트리밍 할 수 있었다면 애플뮤직은 비틀즈나 레디오헤드와 같은 굵직한 아티스트의 음원을 먼저 스트리밍 하기도 했고요. 유튜브뮤직은 동영상에서 가져온 알고리즘뿐 아니라 동영상까지 음원으로 활용하는 무기를 가졌고요. 덕분에 버전이나 연주자가 많은 클래식이나 재즈는 유튜브뮤직이 더 방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음악 서비스 중에서 국내 음악서비스를 사용하지 않았던 이유는 일단 가요를 거의 듣지 않기 때문이었는데요.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오래전 스포티파이는 저에게 국내 음원 서비스에서도 나오지 않은 국내 아티스트들을 발굴해주기도 했습니다.
가요를 안 들어서 스포티파이를 사용하긴 했지만 오히려 국내 숨은 아티스트들을 발견한 것처럼 이 음원 서비스들의 핵심 역량은 큐레이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정 음원이나 아티스트를 스트리밍 할 수 있었던 권력은 서비스들 간 차이가 희미해지긴 했지요. 사실 스포티파이가 그동안 너무나 넘사벽의 큐레이션 역량을 보여줘서 다른 서비스들은 비교가 불가능했습니다. 큐레이션은 좋아요나 반복 듣기 등 사용자의 행동 패턴에 따른 서비스의 추천 역량입니다. 그걸 얼마나 이음새 없이 수행하냐도 관건이고요. 수년 전만 해도 넷플릭스는 스포티파이의 큐레이션 알고리즘을 가장 선망했고 다른 기술 기업들도 모두 스포티파이 인재들을 탐냈지요. 하지만 이제는 큐레이션 알고리즘의 수준이 대부분 비등해졌고, 오히려 각각의 플랫폼의 특징들을 더 확장하는 형태로 발전했습니다. 다만, 스포티파이는 몇 년 전 국가별 로컬라이징이 되면서부터는 빛나던 큐레이션은 국내 사용자들의 성향에 대응하는 알고리즘으로 바뀐 듯해서 저로서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스포티파이로서는 멜론이나 벅스의 사용자들을 유치해야 했을 테니 당연한 비즈니스 판단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 유튜브에서 뭐든 틀어놓으면 알아서 재생되는데 돈 내고 음원 서비스를 왜 이용해?"라고 의아한 사람도 있겠습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음원 서비스들은 무한 리스트 생성, 무한 재생을 제공합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지난해 국내 2,344명을 대상으로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 이용 방법을 조사한 결과, 자신이 만든 재생목록이나 플랫폼이 집계한 음원차트에서 직접 노래를 골라 듣는 비중은 줄고, 취향이나 기분에 맞는 플레이리스트를 듣는 비중은 늘고 있다고 합니다.(기사-링크) 여기에서 플레이리스트란, 프린스나 BTS를 선택해서 들은 뒤에 음원서비스가 제공하는 이 아티스트 성향의 플레이리스트를 뜻하는 게 아니라, '2023년 크리스마스 무드 재즈', '격하게 운동할 때 듣는 아이돌 음악', '새벽을 가르는 센티멘털 로우파이 리스트' 이러한 리스트를 뜻합니다.
멜론 top100을 듣거나 시즈널 한(크리스마스) 또는 상황에(운동할 때) 적합해 '보이는' 리스트를 재생하는 이유는 모두 이해의 선상에 있습니다. 세상에 너무 많은 콘텐츠가 있고 거기에서 무언가를 '선별' 해서 나에게 적합한 합의를 찾아내는 일은 망망대해에 나서는 일처럼 막막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저 많은 것들 중 좋은 것을 놓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아니면 단지 귀찮은 일로 사료되기도 합니다. 기술의 발전은 무시한 채 고루한 '형식'을 지향하는 옛날 사람의 생각으로도 들리겠습니다만 실상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 망망대해에서 20년 전보다도 더 적은 종류와 숫자의 콘텐츠만을 접하고 있다는 현실을 부정 또는 외면합니다. 물론 더 적은 수의 콘텐츠를 향유하는 세상이 되어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건 그 귀찮음으로 인해 생기는 파장이 문제죠. 바로 수많은 가치들 사이에서 무취향의 상태로 스스로 소비되는 삶입니다.
"다수에 대해서 어떻게 인지하고 다수를 만들어낸 미디어 속에 어떻게 존재하냐는 문제."
영화를 예를 들어볼까요? 눈 뜨고 일어나면 수십, 수백 개의 영화가 쏟아집니다. 그럼에도 그 많은 극장에서는 같은 영화만을 걸어놓고 있지 않나요? 상영관은 몇 배나 늘어났고 콘텐츠는 그보다 몇 십배나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요. 극장 얘기는 할 것도 없지요. 넷플릭스와 디즈니와 애플과 아마존이 제공하는 그들의 콘텐츠는 매 주말마다 여러분이 TV시청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콘텐츠를 쏟아냅니다. 각 브랜드가 생각하는 타깃이나 철학, 정치적 올바름, 비즈니스적 계산까지 다 적용된 콘텐츠들이 의도하는 바의 리스트로 제공되고 있지요. 그래서 영화가 너무 많으니 뭘 하냐면 IMDB와 같은 스코어링 사이트를 참고합니다. 하지만 20년 전, '대부'에 스코어링을 한 소수의 사람들과 최근에 '어벤저스'에 스코어링을 한 다수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입니다. 이 다수의 사람들은 '본인의 취향이 있다고' 미디어에 의해 교육된 사람들이니까요. 그러니 안타깝게도 저 스코어를 보아도 저로서는 사실 신빙성이라고는 희박하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시민케인이 좋은 영화고, 해리포터는 아니다는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다수라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인지하냐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다수를 만든 미디어 속에 우리가 어떻게 존재하냐는 것이지요.
기술 기업과 그 기업들이 만들어 낸 플랫폼은 고도화된 알고리즘으로 가득합니다. 우리가 소위 도파민의 노예가 된다는 건 사실 여러분만의 잘못은 아닙니다. 하지만 헤어날 방법도 쉽지 않지요. 저는 SNS의 경우에 몇 가지 가계정을 돌아가며 봅니다. 적극적인 생산자의 역할은 도저히 못하지만 새로운 것을 보는 것에 대한 욕망은 여전히 크거든요. 그런데 인스타그램은, 틱톡은, 그리고 대부분의 SNS는 제게 새로운 것을 안 보여줍니다. 계획된 것을 보여주려고 하지요. 어떤 분야의 사람들을 팔로잉하고 좋아요를 누르던 그 교집합의 지점에서부터 서서히 대중의 인기 콘텐츠들로 저를 몰고 갑니다. 예를 들어 저는 (생긴 것과 달리) 현대무용을 좋아하는데요. 어느샌가 무용>춤>댄스의 로직(?)으로 결국 민망한 옷을 입은 분들의 민망한 춤으로 알고리즘이 확대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몇 개의 계정을 두고 어떤 계정은 철저하게 캠핑과 하이킹에 관한 것들만, 어떤 계정은 악기 연주와 관련된 것들만, 어떤 계정은 달리기와 현대무용 계정들만 팔로잉하고 관련된 것들만 보는데도 알고리즘과 숨바꼭질 하는 게 여간 쉽지가 않습니다. 저라고 도파민에 중독되지 않는 항체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이런 고육책이라도 쓰는 거지요.
다수의 생각과 무취향에 대해. 2분 50초부터 재생하면 됩니다.
우리가 좋아서 듣는 음악, 좋아서 보는 영화, 좋아서 구매하는 상품, 좋아서 하는 경험,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취향에 기반한다고 믿고 싶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취향대로 소비하고 있지 않을 확률이 더 높습니다. 경제 지표가, 기업 논리가, 기술의 방향이 그것을 반증하지요. 기업은 여러분들이 취향이 있는 사람이라고 받들어주기까지 합니다만 미안하지만 스마트폰을 들고 있다면 이미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의 게임과 다름 없습니다. 여러분의 탓은 아닙니다.
소비가 삶을 정의한다고까지 보이는 세상에 살고 있으니 현명한 소비를 위해 취향을 가져야 한다? 아니 그건 알아서들 하시기 바랍니다. 취향이 없으면 어떤 삶을 살게 될 거라는 그런 얘기를 하고 싶진 않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미 경고한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다만, 소비자로서가 아닌 브랜드를 만들고 키워나가는 사람에게 취향의 문제는 존폐와 연루된 문제입니다. 취향이 없으면 어떤 물건을 만들게 되고, 어떻게 물건을 판매하고, 어떤 방식으로 커뮤니케이션할지가 모두 달라집니다.
전 세계의 어느 무인양품 스토어에 들어가더라도 여러분은 무인양품 특유의 '그 음악'을 듣게 될 겁니다. 아이슬란드의 차가운 바람을 실어올 것 같거나 스코틀랜드 광야의 목가적인 정취를 떠올리는 그 민속적인 BGM 말이죠. 스포티파이에서 보면 무지의 플레이리스트는 2001년 버전부터 각 도시나 지역을 타이틀로 브랜드의 플레이리스트에서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런 민속적인 음악이 설립자나 브랜드의 취향이어서 그걸 잘 지켜왔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40여 년 전 무인양품은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이 브랜드의 핵심 가치였습니다. 그런데 이 무취의 상품 브랜드를 지향하는 것이 점점 센스 있는 도시 사람들의 심플한 삶으로 내비치기 시작했죠. 그래서 무인양품은 최근에 다시 한번 '보통 사람들의 보통 일상을 풍부하게'라는 철학을 공고히 재고했습니다.
"목적은 대부분 취향에서 발촉합니다."
다른 브랜드들은 그 상품과 고객들의 것이 특별한 무언가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 일반인데 무인양품은 그렇게 브랜드에 새겨진 특색도 다시 벗겨내려고 하고 있지요. '보통'이고 '평범'해야 했던 겁니다. 그게 무인양품의 목적이고 가치였기 때문이고요. 유행하는 대중음악 BGM으로 평범의 가치를 유지할 순 없지요. 대중음악은 때가 지나면 평범이 '아닌 것'이 되니까요. 더불어, 자연을 연상케 하는 민속 음악의 특징도 브랜드의 가치를 잘 대변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무지가 내도록 오카리나나 파이프오르간 소리를 BGM으로 틀어놓고 같은 물건과 같은 메시지만 팔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최근 무인양품을 방문해 보신 분들이 있다면 느꼈겠지만 F&B를 가장 이동이 잦은 매대로 이동, 확장하고 해당 상품도 다양해졌지요. 소비 패턴과 매출에 따라 F&B를 확대하고, 브랜드가 지향하는 삶의 지점에 있는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형태의 제품 개발들이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당신은 취향이 있다고 해줍니다. 취향에 기반한 의지와 욕망으로 해석할 때 지갑을 열기가 쉬우니까요."
이것들은 모두 미션과 목적으로 수행되는 일들입니다. 그런데 그 목적은 대부분 취향으로 형성되고 구체화되지요. 취향이 분명해지면 목적이 분명해지고, 변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세계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도태를 뜻하는 것일 텐데요? 정확히는 변하지 않는 것과 변해야 하는 것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을 뜻합니다. 변해야 하는 것들도 어떤 기조로 변해야 하는지 기준을 가지고 선택할 수 있게 되지요. 이름에도 표명된 바, 무인양품은 무색을 지향합니다. 그 무색에 대한 선호가 누군가의 취향으로 분명히 작동하고 있고, 무인양품은 그것이 '보통'의 일이길 희망합니다.
취향이 기저에 구축되지 않고는 대게의 브랜드는 그저 블루오션을 찾고, 레드오션을 논합니다.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 지점을 탐색하고요. 용케도 '누군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브랜드를 운영한다는 분들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왜 하필 그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지 물어봅니다. 굳이 '그 사람'이었던 이유는 내가 평상시 오래 보고, 유심히 보고, 깊게 생각하는 일이기 때문이었죠. 문제의 깊이에 따라 우리는 이것을 '가치'라고도 부릅니다만 대부분은 '취향'에서 발촉됩니다.
이게 멜론 top100을 듣는 것과 개인의 뮤직 리스트를 만드는 것과 무슨 상관이냐면, 취향은 그 리스트에 넣을 뮤지션의 이름과 곡 제목을 알고 그와 비슷한 음악이 나에게 어떻게 작동하는지 스스로 정의할 수 있는 일을 하는 ‘버릇’에 기인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이 버릇이 없이는 음악 자체를 들을 수도 탐색할 수도 없었지요. 그때는 불가결한 일이었습니다만 지금은 이 버릇 자체를 미디어와 기술이 거세해 버립니다. 그런 노력과 탐구 없이도 첨단의, 최신의, 트렌드의 것들을 다 섭렵할 수 있습니다. 기업 입장에서는 그런 게 없어야 여러분들이 계속 플랫폼에 머물 수 있고, 더 다양한 걸 들려줄 수 있고, 더 다양한 걸 팔 수 있으니까요. 심지어 당신은 취향이 있다고 해줍니다. 취향에 기반한 의지와 욕망으로 해석할 때 지갑을 열기가 쉬우니까요. 그러니 무언가를 솎아내고 광을 내서 닦고 하는 능력은 이 시대에 꼬리뼈마냥 퇴화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이런 시대에 제대로 된 취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파는 사람에고 사는 사람에고 더없는 무기가 됩니다. 내가 무엇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의 버릇들이니까요.
앤드류와이어스
김해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