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데는 다 이유가 있어."
저는 이 말을 참 싫어합니다. 어릴 때부터 삐딱쟁이였던지라 어른들이 제게 뭔가를 설득할 때 이 카드를 꺼내는 순간 넌저리를 치곤 했습니다. 저 논리에 갇혀 있는 이상 저 어른과 어떤 논리적인 대화도 더 이상은 불가능하겠다 생각했지요.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와 같은 이유로 누군가는 무언가를 선택할 수는 있지만, 제가 그와 같은 이유로 무언가를 선택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하니까요.
"저 사람이 유명한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거야."
"옛부터 ~한 사람은 피하라고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어."
"연예인 다수가 다녀간 맛집, 다 이유가 있다."
"백만 개가 팔린 상품!!!"
"빌보드 1위 한 월드클래스 가수"
모두가 자기 삶의 주체자라고 하면서, 합리적인 소비자라고 자청하면서 우리는 참으로도 쉽게 다수의 의견에 자신의 기호를 매몰하곤 합니다. 특히나 지금과 같은 미디어 구조에서 다수라는 것은 더더욱 독을 가질 확률이 높아졌습니다. 문화 평준화가 된 지금 시대에도 미국에서 1위를 한 가수나 영화가 전 세계의 최고일까요? 시장 규모의 차이를 눈 가리고는, 그들 자신도 그리고 그들을 우러러보는 비서구권 국가에서도 암묵적으로 그들의 1위가 전 세계의 1위라고 믿곤 합니다.
설령 인위적으로 조회수를 만드는 일을 하더라도 10만 뷰의 콘텐츠가 되면, 10만 뷰를 인위적으로 만드는 일을 하지 않은 1,2만 뷰의 콘텐츠는 10만 뷰에 비해서는 그저 그렇고 그런 콘텐츠가 되어 버립니다. 우리는 이 시대의 성장 가속 구조를 논리적으로 알고는 있으면서도 여전히 무언가의 성장 곡선을 45도 우상향으로 착각하곤 합니다. 네이버 쇼핑몰에서, 쿠팡에서 적극적으로 광고를 하는 제품들의 제품 페이지 첫 번째에 무슨 문구가 있던가요? "몇 개 판매 돌파", "몇 개 리뷰 작성". 이런 문구를 쉽게 발견하지 않나요? 기실은 그 숫자를 광고로 만든 후, 그 숫자를 근거로 '진짜' 광고를 시작하곤 합니다.
만약 초등학생에게만 피드백을 잘 받더라도 어떤 숫자가 만들어지면 이제부터 그 숫자는 단지 숫자로서 권력이 됩니다. 그것이 이슬람 국가권, 동아시아에서 만들어진 숫자더라도 십만 팔로워의 인스타그래머가 되는 건 팩트가 되는 것이죠.
다른 누구도 아니고 연예인들의 맛집을 절대적 맛집으로 생각하는 것은 대표적인 아이러니로 보입니다. 소고기와 돼지고기도 구분 못하는 어느 방송인이 다녀간 고기집을 줄 서서 먹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연륜이 쌓이면서 미식의 기준과 경험이 높아진 사람도 분명히 있지만 사실 연예인들은 매장에서 식사를 하는 것이 쉬운 사람들은 아닙니다. 특히나 활동이 많은 연예인들은 어쩔 수 없이 이동 중이나 배달 음식을 많이 먹을 수밖에 없는 생활 패턴을 가지고 있습니다. 방송에서 맛있게 먹는 건 어떨까요? 카메라 앞에서 맛없게 먹을 사람은 드물 테지요. 먹방 유튜버들의 맛집도 저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기준 중에 하나인데요. 많은 음식을 입 안에 집어 넣고 경이롭게 소화시키는 것으로 수 많은 구독자를 만든 많은 먹방 유튜버들이 미식가일 거라고 생각하기는 저로서는 아무래도 어렵습니다. 그야말로 줄을 서는 가게가 맛 있어서도, 망하는 가게가 맛없어서도 아니게 된 세상이 되어 버렸죠.
"뭐라고 너가 그 사람 말에 반박해ㅋㅋ" 보통 이런 말은 뒤이어 이 대사도 따라옵니다. "너 뭐 돼? 너 뭐 있어?ㅋㅋ" (꼭 'ㅋㅋ'를 붙여서 '뭣도 안 되는' 상대가 조롱거리임을 확정하고자 노력합니다)
일단, '뭐'가 되면 그래도 된다는 걸까요? 이미 무언가에 그리고 누군가에 속박된 삶을 살고 있다고 이실직고 하는 꼴입니다. 각자가 자신의 존엄성을 가지고 있기에 '그래도 되는' 겁니다. 또 반대로 각자가 상식과 존중이 있기에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고요. 뭐가 되지 않으면 주장할 수 없다면 반대로, 뭐가 되면 함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청소년기야 다수에 소속되지 못하고 다수에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끔찍한 지옥처럼 느껴지겠지만 성인이라면 다수에서 안정을 찾으려는 일은 좀 내려놔도 될 것 같습니다. 그게 편한 사람에게 왜 굳이 불편한 길을 가라고 하냐고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다수의 길은 그렇게 편안하지만은 않습니다. 그 선로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불행의 바다 속으로 떨어지곤 합니다. 다 하는데 하지 못하는 것 같고, 나만 못 먹어 보고, 나만 못 입어 보고, 나만 못 살아 보고, 나만 뒤쳐진 것 같은 그런 박탈감, 위화감, 소외감. 그러니까, 자기만의 기준으로 자기 신념으로 사는 게 더 고결해서가 아니라, 무작정 따르는 다수의 논리가 더 삶을 위태롭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두쫀쿠를 사기 위해 새벽부터 몇 시간의 줄을 서는 사람들은 경험의 행복을 기대하는 걸까요? 경험 상실의 불행을 피하려는 걸까요?
진리는 다수결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모두들 인생의 많은 경험에서 이 이치를 깨달으셨겠지요. 진리는 아집으로 지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일반화로 강화되는 것도 아닙니다. 진리가 어디에 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마음과 눈이 열려 있는 곳에 있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편견 없는 시각과 열린 마음을 가지려면 다수의 편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채로는 불가능하리라 생각됩니다.
앤드류와이어스
김해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