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그 언어의 집에 인간이 산다." - 하이데거
브랜딩은 하나의 세계를 만드는 것이고 그 세계의 대부분은 언어로 만들어집니다. 마케팅도 최선의 이해를 다하여 최선의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 대부분의 일입니다. 일하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언어에서 자유로울 수 없죠. 이 언어를 쓰는 자아와 저 언어를 쓰는 자아가 분리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일할 때는 이 언어를 쓰고 SNS를 할 때는 다른 언어를 쓰고, 누군가를 만났을 때는 또 다른 언어를 쓰는 것 역시 존재를 분리하고 다른 존재를 부정하는 일과 다름없습니다. 상황과 때에 따라서 더 어울리는 언어라는 게 있지 않나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상황과 때가 달라져도 변하지 않는 자기 자신이라는 사람은 더욱 분명해야 합니다. 대개 자기 주관과 자존이 부족할 때 우리는 '상황에 맞게'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탈바꿈하곤 합니다.
SNS에 달린 댓글의 언어만을 본다면 세상이란, 세상을 구성하는 사람들이란 끔찍하기 그지없습니다. 그것이 끔찍한 일인지조차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더 우울합니다. 세대와 집단의 동질과 공감을 추구하는 언어 사용이라고 착각하며 오히려 바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을 배격하는 일도 쉽게 목격합니다. 그런 언어에는 차별과 비하가 난무합니다. 틀딱, 지잡대, 퐁퐁남, 씹고인물, 씹선비, 맘충, 진지충.. 어딘가의 위치에서 자신의 능력을 오랫동안 잘 닦아 온 사람에게 씹고인물이라뇨.'-충' 그야말로 벌레를 뜻하는 말을 서슴없이 씁니다.'씹-'과 '개-'를 보편적인 부사처럼 사용합니다. 매우, 아주, 많이, 급격한... 등의 모든 꾸밈말을 '존나'로 통일하며 비루한 어휘력을 자신 있게 떠벌립니다. 아마 '존-'을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 사람들은 '좇나'를 순화해서 쓰는 자위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씨발', '좇나'라고 정확하게 사용했으면 합니다. 그 말의 발음을 순화한다고 그 뜻이 순화되지는 않습니다. 차라리 지금 이 문장에 그 비속어를 쓸 만큼이나 이 문제가 위중하다는 것을 밝혔으면 합니다. '씨발'은 '씹을 할'에서 나온 단어로, 확장하면 '네 어미 씹을 할'이라는 뜻도 됩니다. 'ㅅㅂ'이라는 자음을 쓴다고 면책될 건 딱히 없습니다. 순화했고 또 집단의 언어라 자위하며 이런 단어를 함부로 쓰면서 경각심은 급격히 추락합니다. 아니 저런 단어를 쓰지 않으면 어떤 세대 또는 집단에서 배척당할까 봐 누군가는 오히려 일부러 쓰려고 합니다. 그런 언어로 종속되어야 하는 집단이라면 기꺼이 나오셔도 됩니다. 당신은 그것보다 더 상식적이고 정의로운 사람입니다.
저는 여러 면에서 대한민국의 교육을 언제나 안타까워하는데요. 특히 정규교육에서 토론을 제대로 배울 수 없다는 것은 가장 안타까운 일 중 하나입니다. 인터넷상에서 누군가가 의견을 개진하고 개진한 의견에 동의하거나 다른 의견이 있을 때 사람들은 너무나 비루한 방식으로 의견을 개진하거나 스스로를 표현합니다.
'100분토론'은 소위 지도층의 토론 수준이 저 모양이구나를 여실히 드러내보이기도 했지만 반대로 토론을 할 수 있는 어른들이 아직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 프로그램이기도 했죠.
'관상은 과학이다' 논리적인 반론을 포기하며 쉽게 상대의 존재 자체를 하여 그 상대의 의견 자체를 뭉갤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이 말을 씁니다. 관상은 과학일지도 모르지만 어떤 의견을, 그 사람 자체를 송두리째 힐난할 명목으로 쓰일 수는 없습니다. '뭐뭐 한 거 보니까 답 나온다'는 말도 유사한 논리 포기의 하나입니다. 일반화의 모순을 학교에서 제대로 배우지 못한 탓이겠지요. 일반화는 논리를 접어놓기에 아주 편리한 방편입니다.
"진지함을 고도로 혐오하는 사회는 어떤 문제도 진지하게 해결할 수 없습니다."
'긁?'과 같은 말은 수많은 모순과 비겁함이 결합된 말 중 하나입니다. 온갖 인신공격과 비난은 다 하고선 상대방의 감정선만을 지적하며 너 긁혀서 그러는 거냐?라고 비아냥 거립니다. 그 말에는 '나는 긁히지 않았는데 너는 긁혀서 지금 그러고 있니?'라는 뜻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이는 제삼자에게 상대의 소인배스러움을 놀리고 호응을 유도하며, 마치 자신은 대인배인양 논쟁 상대와의 논점에서 도망치는 비겁함입니다.
토론과 논쟁을 할 때 'ㅋㅋㅋ'를 남발하는 사람 역시 그 비겁함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과격하게 상대를 욕하고 비난하면서 중간중간에 알뜰하게 ㅋㅋㅋ를 써가며 '그렇게 진지할 건 아니고, 나도 웃고 편하게 하는 말이야'라는 뜻을 담보합니다. ㅋㅋㅋ를 쓰며 상대의 모든 논리를 웃음거리로 전락시키고자 노력합니다. ㅋㅋㅋ를 남발하며 본인은 그렇게 진지하게 이 문제에 뛰어들지 않았다고 남들에게 또 스스로를 피력합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 메시지를 쓰는 당사자의 얼굴에도 웃음이 피어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진지함을 고도로 혐오하는 사회는 어떠한 문제도 진지하게 해결할 수 없습니다.
토론을 부정하는 이런 모습들은 겉으로는 모두 쿨해 보이는 것 같지만 기실은 논리적인 대화는 진행할 수 없다는 것을 시인하는 꼴입니다. 차마 이런 조롱과 비아냥을 할 수 없는 토론 자리에서는 비로소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화를 내는 것 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화를 내지 않고, 상대의 의견을 경청할 줄 알고 또 상대가 내 얘기를 경청할 수 있게 하는 대화의 기술은 사회를 구성하는 성인이라면 응당 갖추어야 하고, 갖추지 못했다면 노력해야 하는 일입니다.
설령 밖에서는 예컨대 일자리에서는 젠틀하고 상식적인 언어를 구사하니까 괜찮다고 안위할 일은 아닙니다. 언어는 단지 인품이나 계급을 드러내기 때문에 조심해야 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언어는 계속 사용하면 관점이 되고, 관점은 태도가 됩니다. 태도는 가치관이자 바로 자신입니다. 일할 때의 나와 휴대폰이나 키보드 위에서의 내가 분리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뭐 철없는 애들이나 쓰는 몇몇 언어로 이러냐... 그런 언어를 쓰는 사람은 실제로 사회에서 근처에 있을만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현실이죠. 지금 뉴스를 틀어보면 목격할 수 있습니다. 초등학생 수준도 못 되는 논리와 비상식의 사람들과 우리는 함께 살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도 그 사람들 중 하나가 될 수 있고요. 안타깝지만 부정할 게 아니라 공존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떤 공존의 방식을 갖출지를 선택해야겠지요. 그 자체로서 언어는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수단입니다. 일국의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극단에 치우친 시각으로 저속한 언어와 행동을 일삼는 야만의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어를 통해 인간의 존엄을 포기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일하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현상과 사물의 정의를 게을리할 수 없습니다. 정확하지 않은 거, 정확하지 않은 말을 쓰는 거. 더 정확한 정의에 닿으려고 하지 않는 마음은 스스로를 낮은 곳으로 데려갑니다. 낮은 곳에서는 저질의 것 밖에는 팔 도리가 없지요. 일하는 사람은 탐구하는 사람입니다. 단지 일련의 단순한 일을 수행하는 로봇이 아닙니다. 철학자나 과학자라서가 아니라 일하는 사람 역시 응당 진리를 탐구합니다. 그것이 나무젓가락이든, O2O 서비스든 우리는 진리를 추구하기에 그것을 내놓습니다. 그래서 제품은 그것의 정의어야 합니다. 순수한 정의를 제품이라고 한다면, 순수한 정의에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그 제품을 파는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무언가를 믿지 않는다면 무언가를 팔 수도 없습니다."
언어는 믿음의 옷이기도 합니다. 믿고 있는 것을 언어라는 옷으로 두르는 것이죠. 무언가를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언가를 팔 수도 없습니다. 궁극적으로 소비자는 당신의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믿는 것을 삽니다. 무언가를 팔려면 일단 무언가를 믿어야 합니다. 믿기 위해, 그리고 믿게끔 하기 위해 우리는 언어가 필요하죠. 언어를 소중히 해야 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어두운 곳을 밝혀줄 언어를 부단히 익히고 세계를 형성할 논리를 언어에서 얻어야 합니다.
앤드류와이어스
김해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