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터라면 다시 봐야 할 영화들
세상엔 실제로 성공한 사업을 소재로 한 영화나, 마케팅이나 세일즈 자체를 다룬 영화도 수없이 많습니다만 오히려 그런 영화들에서는 해당 업계 사람으로 봤을 때는 보편적인 관람객들을 위한 친절한 설명과 드라마틱한 스토리 전개에 집중한 나머지 오히려 디테일이나 인사이트가 떨어지는 경험을 많이 하게 됩니다. 소개해드릴 영화와 드라마는 실질적인 마케터의 일을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마케터나 기획자, 그리고 창업자라면 뷔페 마냥 차려진 인사이트가 가득한 영화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영화들이기도 합니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스포츠 에이전트인 제리 맥과이어는 머리를 스치는 '진리'를 흘려보내지 않고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문서로 만듭니다. 그리고 비 오는 새벽 거리를 뚫고 24시간 프린트점에서 110부를 카피합니다. 이 문서는 회사를, 업계를, 세상을 바꿀 것 같았죠. 하지만 제리는 다음 날 회사에서 보기 좋게 잘립니다. 바로 여기에서 시작합니다. 제리가 작성한 그 문서는 바로 미션 스테이트먼트입니다. 스포츠 에이전시로서 그리고 각각의 에이전트로서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비전으로 제시한 문서입니다. 진심으로 대할 수 있는 더 소수의 선수(클라이언트)를 진정으로 위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그의 비전은 현실에서는 가차 없이 내차입니다. 이것이 비즈니스를 운영하는 여러분들이 이 영화에서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인사이트라고 생각합니다.
"미션 스테이트먼트를 무시하는 사람들을 저는 무시할 자신이 있습니다."
제리 맥과이어에는 'Show me the money'와 'You complete me'라는 양대 명대사가 나오는데요. 로맨스물로 봐도 무방할 이 영화는 그런 차원에서라면 후자의 대사를, 마케터의 입장에서 볼 때는 전자의 대사를 꼽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제리는 의기양양하게 진심의 비전을 내세웠지만 현실이 다름을 뼈저리게 겪게 됩니다. 그러다가 겨우 한 명 붙잡게 되는 선수인 로드(쿠바구딩 주니어)는 진짜 나에게 다 바칠 거냐는 확답을 들려달라며 제리에게 Show me the money를 외치게 하고 클라이언트를 다 놓친 제리는 절망에 가득 찬 채 따라서 소리치죠. 두 번째 인사이트는 이겁니다. 결국 제리는 자신의 미션스테이트먼트와 달리 현실에서는 본인조차 그렇게 '이상적'일 수 없다는 걸 알게 됩니다. 제리가 행한 일들은 자신의 신념을 믿어서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는 벼랑 끝 상황에서 그럴 수밖에 없는 일들이었죠. 결론은 그 벼랑 끝 상황 때문에 오히려 제리는 자신의 신념을 믿을 수 있게 되는 상황에 다다르게 됩니다. 미션 스테이트먼트를 무시하는 그 모든 사람들을 저는 과감하게 무시할 자신이 있습니다. 제리는 그 문서에 '목적'을 기입했거든요.
빌리(브래드 피트)는 한때 유망주였으나 결국 실패한 선수 출신으로 메이저리그 연봉 총액 최하위팀인 오클랜드 애슬래틱스의 단장이 되어 팀을 리빌딩해야 하는 미션에 임합니다. 영화 초기에 겨우 남은 선수를 비싼 값에 트레이드하기 위해 그가 상대팀 트레이더와 통화하는 '뻥카'는 당시 메이저리그에서는 일반적인 선수 평가와 트레이드의 과정이었죠. 그러다가 선수들의 통계 기록을 담당하던 예일대 출신의 피터(조나 힐)의 출루율을 기본으로 한 '머니볼' 이론을 적극 적용하여 이 오합지졸의 팀에서 기적에 가까운 승률을 만들어 내기 시작합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의 내용은 그렇습니다. 친애하는 극작가인 아론 소킨이 이 구단 지하 창고에서 벌어지는 제한된 환경에서 대사를 맛깔나게 뽑아내고 긴장감도 잘 잡아줍니다.
"아주 원론적인 것에 의심해 봤기 때문에 재해석할 수 있었던 것이죠."
비즈니스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머니볼에서의 인사이트를 데이터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도 처음 볼 때에는 그렇게 봤으니까요. 평판으로만 돌아가는 많은 일들, 합리성과 데이터로 지칭되는 숫자들로 세상의 많은 것들은 객관화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조차 현시점의 많은 사람들이 '수치화' 할 수 있고 '비교' 가능한 일에 한해서 일지도 모릅니다. 세상에는 아직도 수치화할 수 없거나 객관적인 비교가 불가능한 일들 투성이니까요. 애슬래틱스는 우승이 아닌 생존이 존재의 이유와 같았습니다. 생존하기 위해, 더 이상 개발자가 느리다느니, CMO가 고루하다느니, 마케터가 엄한 곳을 판다느니, 그런 하소연을 하고 있을 순 없죠. 소위 시장에서 비싼 연봉의 직원들로 교체할 자금도 시간도 없습니다. 딱 애슬래틱스와 같은 상황이죠. 애슬래틱스는 데이터의 중요성을 알았기 때문에 통계를 들여온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환경을 재해석하고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데이터라는 매개로 고안해 낸 것이죠. 환경을 재해석한다는 것은 틀을 무너뜨려야 가능합니다. '승률을 높이려면 좋은 선수가 필요해. 그런데 좋은 선수는 비싸.' 이러면 나아갈 수 있는 방안은 없습니다. '좋은 선수는 근데 왜 비싼 거야?'라는 아주 원론적인 것에 의심해 봤기 때문에 재해석할 수 있었던 것이죠.
11명의 로비스트를 만나 캐릭터를 연구했다는 제시카 채스테인이 견인하는 영화 미스 슬로운은 숨 가쁜 전개와 치밀한 빌드업, 그리고 짜릿한 반전을 선사하는 웰메이드 스릴러입니다. 워싱턴에서 100% 승률을 자랑하는 로비스트인 슬로운은 극에서 총기규제 법안이라는 엄청난 챌린지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 약한 쪽 팀에서 이 게임을 펼치게 되죠. 슬로운 자체가 경장한 실력자인 것은 여지없이 드러납니다만 슬로운이 리더로서 이 약팀을 끌고 올라가는 팀 플레이가 영화에서는 압권입니다.
영화에서 슬로운은 사실 그렇게 도덕적이거나 자신의 신념이 사회적으로 엄정한 사람이 아닙니다. 실제로 승리를 위해서 위법을 저지르고 도덕적으로도 완벽히 깨끗한 히로인이라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총기 소지 합법의 당에 설 수 없었던 것은 정말이지 그녀의 바텀 라인이었기 때문이죠. 오히려 승리를 갈망하는 집요함이 그 치열함들을 뒤받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뻔한 권선징악도, 도덕적인 영웅의 승리도 이 영화에서는 목도할 수 없습니다. 일단 슬로운은 거의 미쳐있는 수준의 grit을 보여줍니다. 아마 이런 종류의 사람들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면 대게, "그럴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한다"라고 하죠. 그래서 그녀가 포기해야 했었던, 예컨대 가정이라던지 여유(그녀는 각성제를 먹으며 수면 시간 자체를 거세해버립니다) 같은 건 그녀가 포기해야 했던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기꺼이 버리고 싶었던 일처럼 보이죠. 그러다가 도저히 이길 방법이 희박한 상황에서 그녀는 팀 동료를 승리의 장작으로 사용하고 맙니다. 슬로운의 이 승리에 대한 갈구가 이 영화를 멱살 잡고 끌고 갑니다. 슬로운은 마지막에 기꺼이 그에 대한 대가까지 치릅니다. 이미 그 대가를 면밀히 계산해놓고 있었죠. 그녀로서는 '그럼에도' 저질러야 했던 일인 겁니다. 저렇게 밀어붙일 수 있다면, 그래서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면, 그러니까 워라밸 따위 간단하게 변기에 내려보낼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면 사실 어떤 가치를 제대로 창출해 내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도 동명의 드라마로 제작된 법정 드라마인 슈츠입니다.(차마 한국 버전은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법정 드라마가 아닙니다. 시즌9까지 슈츠에서는 법정에서 싸우는 장면은 그다지 많지 않거든요. 드라마의 대부분의 케이스는 법정에 가기 전에 마무리합니다. 클라이언트나 로펌이나 더 많은 이득을 취한 채로요. 손자병법에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합니다만, 백전백승은 최선이 아니다고도 합니다. 손자병법의 모공(謨攻) 편에서, 싸우지 않고 굴복시키는 것이 최상이다. 不戰而屈人之兵, 善之善者也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법정 문제가 그러하든 법정으로 가면 지난한 싸움이 지속됩니다. 이겨도 출혈이 클 수밖에요. 드라마에서 피어슨&하드먼 로펌에 오는 클라이언트의 대다수가 바로 법정에 서기 전에 상대를 굴복시키기를 바라며 이 로펌을 찾습니다. 로펌의 끝내기 투수인 하비와 기발한 두뇌를 가진 로스가 그 과업을 수행해 내죠.
"이들은 상식 또는 일반화와 계속해서 싸워나갑니다."
싸우기 전에 굴복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슈츠에서는 서로 피를 흘리지 않는 굴복의 승리에서 '지피지기'는 피를 흘리는 전투보다도 더 중요하다는 교훈을 줍니다. 나(클라이언트)를 알고, 적(클라이언트의 고객)에 대해서 이들이 알아가는 과정은 굉장히 치밀합니다. 아니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치밀하기 전에 상상력이 뛰어나죠. 상상력에 논리력을 결합하면 치밀함이 됩니다. 센스, 공감, 경험, TPO, 모든 것이 포함됩니다(사실 변호사는 아니지만 하비의 비서인 도나가 이 능력이 가장 뛰어난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것들로 무엇과 싸우냐 하면 '일반화'와 싸웁니다. 변호사들이 가장 철저하게 검증하는 것이 바로 '전제'입니다. "이러했으니까 이러할 거다."라고 전제하는 것이 어긋나는 순간 시간과 결론 모두 망치게 되니까요. 이들은 상식 또는 일반화와 계속해서 싸워나갑니다. 브랜드나 브랜드의 고객을 생각할 때, 여러분들은 어떤 '전제'들을 거기에 깔아놓고 있나요?
미슐랭 스타를 받은 파인 다이닝에서 수셰프로 일하던 카르멘이 형이 죽고 남긴 시카고의 샌드위치 레스토랑에 와서 이 식당을 운영하는 이야기입니다. 음식이나 레스토랑을 주제로 한 영화는 대부분 가리지 않고 보는 저로서는 더 베어에서 보여주는 주방은 정말 심박수가 극에 치닫는 긴장감을 안겨주는 드라마였는데요. 위플래쉬의 마지막 협연과 같은 상황이 이 주방에서 계속해서 펼쳐집니다. 최상위 레스토랑에서 일하던 주인공이 마약 문제가 얽히거나 자신의 방식을 고수하겠다는 고집불통과 기본기도 없는 팀원들을 데리고 전기세를 내지 못해 전기가 끊길 판인 허름한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일은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주인공 카르멘은 매 순간 폭발할 것 같은 감정을 꾹꾹 눌러 담으며 곰이 갑자기 튀어나와 난자질 당할 것 같은 불안과 압박 속에서 힘겹게 한 걸음 한 걸음을 나아갑니다. 심지어 가게가 불타서 다 사라져 버리기를 바라기도 하죠. 많은 스타트업 운영진들이 떠오르더군요. 비즈니스 운영진이라면 아마 기본적으로 곰이 들어있을지도 모르는 커다란 박스 앞에 서있는 이 드라마의 오프닝 시퀀스의 장면에 공감하리라 생각합니다.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이든 샌드위치 가게든 기본적으로는 똑같은 겁니다. 그걸 알려줍니다. '나는 아이폰을 파는 게 아니라 휴대폰 케이스를 판다고!' 이런 생각은 비즈니스에서는, 브랜딩에서는, 어이없는 변명에 가깝습니다.
"가치를 동의하고 함께 할 수 있는 동료를 만나거나 만들어 가는 일, 그것만이 거의 구원에 가까운 일이죠."
브랜드가 성공하고 매출이 많이 나면 카르멘이 겪는 것과 같은 스트레스 상황은 타개가 될까요? 아마 어느 정도는 해결되겠지만 근본적으로 그 상황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죄송합니다. 제가 여러 번 목격했습니다). 사업을 그만두지 않는다면요. 하나를 해결하면 세 개가 터지는 카르멘도 비슷한 상황입니다. 이 레스토랑이 성공한다고 해서 카르멘이 행복할 거 같지도 않고요. 매회 카르멘을 끌고 가는 것은 결국 사람입니다. 내가 창출하고 싶은, 하여 전달하고 싶은 가치를 동의하고 함께 할 수 있는 동료를 만나는 일, 또는 그런 동료로 만들어 나가는 일, 그것만이 거의 구원에 가까운 일이죠. 카르멘에게는 그렇다는 겁니다. 여러분에게는 다른 구원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앤드류와이어스
김해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