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I 세대의 실무자들에게
2026년 11월01일
조롱예찬
2026년 11월05일1. 비난의 희열
(우리가 보는 대부분의 콘텐츠 피드 알고리즘에서 좋아요보다도 더 높은 인기도를 만드는 것은 댓글입니다. 댓글을 보는 것이 그 콘텐츠를 가장 오랜 시간 탐닉하는 결과가 나오니까요. 과거엔 어떤 콘텐츠의 댓글을 보는 재미가 있을 때도 있었지만 요즘은 어떤 콘텐츠고 댓글을 보는 게 끔찍한 경우가 많습니다. 마치 가까운 미래의 멸망을 직접 확인하는 것 같아 끔찍합니다. 마치 비난과 조롱이 의사 표현의 가장 효과적이면서도 의미 있는 형태가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세상이 제게 몰래카메라를 하는 걸까요? 누가 더 비난을 잘 선동하나, 누가 더 고도의 조롱을 잘하나로 댓글의 인기도마저 판명됩니다.
비난받아 마땅할 것들이 비난받는다고 생각하고 또 거기에 기꺼이 동참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비난이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는 없다고 믿습니다. 내 생각에 더 동조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확인하는 집단적 소속감과 인정욕, 그리고 도덕적 우월감과 감정적 보상에서 오는 배설의 희열이 그것을 용인하다 못해 적극적으로 행하는 상황에까지 이른 것 같습니다.
특정 무리를 욕하는 것은 내가 속한 준거 집단이 그 특정 무리로부터 조금의 위해도 받지 않거나 받을 확률을 줄인다는 배척에 그 심리가 숨어 있습니다. 대부분 그들은 이미 '극심한' 피해를 받고 있다고 주장하죠. 러닝크루나 로드바이크를 타는 사람들이 도로를 무분별하게 점거하는 것을 비난하고, 캠핑하는 족속의 쓰레기와 소음 문제를 비난하고, 골프나 테니스를 치는 과시적 취미를 비난합니다. 반려견의 높아진 위상에 견주를 비난하고, 오토바이 배달원들을 딸배로 지칭하며 비난하는 것도 흔하죠.
특정 무리보다 더 심각한 비난(혐오)의 대상은 특정 집단입니다. 젠더 문제는 젊은 사람들에게 만연하게 퍼져 있죠. "한남은...", "한녀는..."과 같은 말은 어떤 논쟁들에서는 너무나 일반적인 논리의 전제가 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 세대는 어떤가요? 요즘 MZ는, 요즘 청소년은, 노인은(노인이라고 하면 다행이게요. 틀딱이라고 하죠), 무개념 부모는(역시나 맘충과 같은 비속어를 사용하죠)... 끝도 없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무리나 집단의 잘못이 없느냐 하면 그건 아닙니다. 분명 그 무리나 집단의 일부 또는 상당수가 상식에 어긋나거나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일을 하곤 합니다. 비난에서 내가 얻는 것은 그들을 교화시키거나 그들을 사회에서 제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경단이 되어서 특정 집단에 린치를 가하고 다니는 정신 나간 사람도 있습니다만 대부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죠(있어서도 안 되고).
마라톤 경기 이후에 도로에 쓰레기가 많다는 뉴스 보도가 나니 사람들이 득달같이 성토합니다. 문제를 야기한 본질적인 주체(서울시인지, 정부인지, 주최 측인지, 참가자인지)에 대한 구분은 여기에서 중요하지 않습니다. 구조적이거나 논리적인 접근은 없습니다. 비난 자체가 중요하게 작동할 뿐입니다. 과연 주말의 '내 출근길'을 막은 사람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사람들은 공리주의자가 되어 '누군가의' 이동 시간에 피해를 준 것에 '함께' 동참하고, '다수의 공익을 저해하는' 불합리성을 척결하는 데 열심입니다. 시내에서의 마라톤 수를 줄인다거나 합리적인 기준과 같은 논의는 할 계제도 안 되어 보입니다. 그냥 마라톤이라는 악을 사회에서 지워 내길 바라는 성토만 가득합니다. 이러한 비난의 가장 큰 문제점은 논의의 여지가 없는 분노에 있다는 것입니다.
유명인은 최적의 먹잇거리죠. 어떠한 잘못을 했건, 그것을 비난으로 징벌하는 기준과 잣대에는 (나는 누리지 못한) '유명해서 그 명성과 부를 누리는 값'에 대한 부가세를 톡톡히 얹습니다. 얼마 전 홍명보 전 감독의 사태를 보며 누가 누가 더 고도로 대상을 씹어댈 수 있는지 백일장이라도 열 듯이 사람들은 분노했습니다. 분노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다만 홍명보 같은 사람은 이 사회에, 우리 주위에, 당신 곁에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균형 있는 시각으로 본다면 그러한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우리가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 우리는 같은 기준으로 행동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만연하다고 해서 누군가의 악이 덜한 것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곁에 만연한 악을 악으로 구분하지도 못하면서 미디어가 참수대에 세워 줘서 또, 명약관화해졌다고 믿는 악 앞에서 자신의 분노를 여과 없이 배설해 내야겠다며 나서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었습니다. 악은 우리 곁에 만연합니다. 선이 그렇듯이.
사실 이 비난 문화를 조장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은 미디어인 것 같습니다. 알 권리? 비난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겠지요. 사람들은 비난하는 데 드는 비용들(어떻게도 쓰지 않던 댓글을 기꺼이 달거나, 가계정을 만드는 수고도 불사하는 등)을 기꺼이 지불합니다. 조회와 댓글 참여로 이어지죠. 설령 내 비난이 상식도 없는 정치적 반대 비난을 받더라도 그 불편함보다도 비난의 희열이 상회하는 모양입니다. 미디어는 영악하게도 사람들이 성토할 만한 것을 잘 골라내서 그런 요지를 부각해 '팩트'를 전달한다는 당위를 뒤집어쓰고 보도를 하는 것 같습니다.
예전엔 그런 비논리적이고, 비전도 없고, 그렇다고 문제의 개선 의지도 보이지 않는 비난을 해 대는 사람들은 그저 '초딩'이라고 폄하하면 그만이었습니다만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이제 누가 초딩이고 누가 (사리 분별 가능하고 이성적인) 성인인지는 구분하기 어려워졌습니다. 구분이 모호해지니 비난의 희열을 익명에서 저렴하게 누릴 수 있는 유혹을 마다하고 싶지 않아졌습니다. '나도 그래도 된다.'로 시작된 비난은 어느새 나의 불편함을 강렬한 비난으로 표현함으로써 나의 뜻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더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선동의 욕망도 동반합니다.
비난과 비판은 다릅니다. 비난은 '누가'에 맞추어져 있고, 비판은 '문제'에 맞춰져 있습니다. 또, 잘못을 지적하는 것과 사람을 모욕하는 것은 다릅니다. 책임을 묻는 것과 인격을 부정하는 것 역시 다르지요. 비판은 판단이 타당한지를 검증하는 행위가 수반되어야 하지만, 비난은 타인의 잘못을 확신하는 순간 자신의 판단 근거를 검증하는 행위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곤 합니다.
비난(혐오)이 만연해지면서 이제 어떤 대상도 꺼릴 것이 없어졌습니다. 노동자, 노조, 자영업자, 소비자, 복지 수급자, 취약 계층, 이주민, 외국인 노동자, 비혼자, 딩크족, 비혼 출산 가족 등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 지위나 계층이 되어 버렸거나 비난받아야 할 이유가 없는 대상조차도 쉽게 비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저 비난합니다. 아니 이유가 있지요. 내가 가진 통념과 논리와 내 시스템에 그 대상들이 기스(흠집)라도 낼 것 같기 때문에요. 비난하는 사람들은 다들 주위에, 특히나 '아는 사람' 중에 그들로 인해 피해를 본 엄연한 사례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비난의 가장 큰 악영향은, 비난에 동참하지 않더라도 그것을 계속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 역시 그 비난을 '여론'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의 '뜻'으로 서서히 받아들이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리하여 비난은 쉽고 또 쉽게 취해도 되는 일로 인식하게 됩니다. 비난은 그저 내 배설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배설이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기도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당신이 척결하고 싶은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습니다. 그 배설에 동조해서 사람들이 길거리로 나와, 또는 행정 단체가 어떤 집단이나 무리를 벌하지 않습니다. 더 많은 분노가 사회에 만연해질 뿐이죠. 만연해진 분노의 화살은 높은 확률로 비난의 당사자도 맞닥뜨리게 됩니다. 비난의 자리를 채워야 할 것은 (변화를 바라는) '행동'입니다. 그리고 그 전에 (생산적 비판을 통한)'대화'가 필요합니다. 분노하고 있으면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죠.
네, 이 글 역시 '비난'에 가깝습니다. 비난하는 자들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역시나 배설을 하고 있음에도 시원해지는 느낌은 없는 점이 안타깝달까요.
앤드류와이어스
김해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