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믿을지 잘 모르겠지만 무엇을 포기할 수 없을지는 안다
요즘 자주 새벽에 잠을 깨고는 합니다. 뭔가를 제대로 해내고 있지 못하거나 정체되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생각에 압도당하곤 하는데요. 아마 대부분의 이유는 믿음의 문제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그것이 제게 희박한 것 같습니다. 종교적인 믿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종교가 없습니다. 무언가에 대한 믿음이죠. 갖고자 하는 것, 추구하고자 하는 것, 지키고자 하는 것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이 있을 때만이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런 믿음이 있을 때만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자신감은 용기가 되죠. 용기가 없으면 어떤 일도 하기 쉽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어지는 것은, 더 많이 알수록 더 많은 것을 확신할 수 없게 되는 이유도 있는 것 같습니다. 과학이 아니라 진리를 추구할 경우 확신은 잘못될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을 깨닫게 되면 그나마 다행이지요. 하지만 그것이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앞섭니다. 세상엔 진리가 아니어도, 정의가 아니어도 때론 무언가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성과를 얻기도 합니다. 손에 무언가가 잡히면 손에 잡힌 그 무언가를 믿기 시작하죠. 믿으려고 했던 그 무언가가 아니라요. 그것이 두렵습니다. 가질 것에 대해 두려워한다는 말이 모순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무언가를 가진다는 것은 믿음이 없을 때는 해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작금의 정국 상황을 보면 믿음이라는 것은 더 무섭습니다. 두 명의 대통령이 이미 탄핵으로 자리에서 내려온 것을 지켜봤습니다. 이제 그 탄핵의 세 번째 주인공을 우리는 앞에 두고 있습니다. 권력이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저는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갖은 힘을 쓰는 것을 일로써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박정희의 딸로서 어떻게 살아왔을까 생각했습니다. 그 사람을 그 자리에 앉혀 이득만을 추구한 자들의 만행이 사실 더 괘심 했고, 누군가의 꼭두각시가 되어 정신 나간 짓을 할 수도 있었던 건 아닐까 측은한 생각마저 해보았더랬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대통령에 대해서는 저의 상식과 이해의 아량이란 얼마나 얕은지 통감합니다. 멀쩡하게 엘리트 교육을 받고 코스에 올라 검사가 되고 법치를 추구했던 자가 권력의 늪에서 완전히 눈과 귀를 잃고 환각 상태와 같은 균형 감각으로 자신의 권력을 지키고자 어떠한 일도 불사하는 것을 지켜봤습니다. 권력이라는 가면에는 무엇이 씌어있는 걸까요? 그야말로 그 사람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권력의 해악이 두렵습니다.
계엄령은 엄연한 국가 권력의 유지 방안 중 하나입니다. 군기관에는 그것이 두꺼운 매뉴얼로도 구비되어 있는 것을 이번에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계엄이 세상에 없는 미증유의 기발한 폭정은 아닙니다. 국가가 특정한 상태면 할 수도 있는 것이 계엄임은 분명하지요. 계엄 해제 요구결의안에 불참한 90명의 국회의원도, 탄핵소추안 표결에 불참한 108명의 국회의원도 안타깝지만 국가가 허락한 법 아래에 할 수 있는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윤석렬 대통령이 자행한 비상계엄은 수많은 헌법을 위배했습니다. 그걸 모르고 있던 것이 아니고 위헌을 하면서까지 저지른 엄연한 범법 행위이고 내란 행위입니다. 108명의 국회의원은 탄핵을 반대했습니다. 6개월이 걸리는 탄핵 절차보다 더 빠른 정권 이양을 하겠다뇨, 탄핵으로 인한 국가 이분화라뇨, 경제와 외교를 나락으로 보내는 일이라뇨. 정녕 그런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태극기를 열심히 흔드는 분들이 흔히들 이야기하는 '경부고속도로 누가 그 짧은 시간에 깔고 국민들 다 밥숟갈 들게 만들었는데'라는 논리는 언제나 민주주의의 근간과 정의는 그 경부고속도로 아래 깔려도 상관없는 것으로 들립니다. 개인적인 바람이지만 우리나라가 여느 가난한 국가보다 덜 발전한 나라여도 괜찮습니다. 정의가 더 서있고 더 공정하게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나라라면 훨씬 좋겠습니다.
정의라는 것에 대해서도 믿음과 마찬가지로 깊은 고민이 필요합니다. 어떠한 공리주의도 삶의 기본 정의 위에 있을 순 없습니다. 그런 정의를 위배할 수 있는 진화와 발전이라면 그 미래에는 언제든 보편타당한 정의가 유린되는 것을 담보해야 합니다. 말한 대로 무엇을 믿고, 믿는 것을 계속해서 믿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무엇을 믿을 수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무엇을 포기할 수 없는지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정치적 테마나 옵션 같은 게 아니라 기본적 정의입니다. 최소한 자본주의의 어떤 것도 포기하지 않겠다면 그러해야 합니다.
계엄으로 유린된 광주의 사건을 소설로 담은 소설가 한강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러 간 먼 이국땅에서 44년 만에 대한민국의 비상계엄을 뉴스로 들었을 겁니다. 그 아이러니는 실소조차 무색하게 만듭니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이렇게 아름다운가?"
한강은 수상 연설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가?'라는 말은 참으로 슬프고도 그야말로 아름답습니다. 아니 결연하게 합니다. 이런 주제를 정치 이슈로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제게는 믿음의 문제입니다. 믿음의 끝에 사랑이 있지요.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또 순진하게 들리겠지만 사랑을 믿어볼까 합니다. 사랑을 담아 정의를 지켜주세요.
앤드류와이어스
김해경